우리의 언어로 우리를 결정한다
다큐멘터리《데프 프레지던트 나우: 8일간의 혁명》과 국제 수어의 날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 《데프 프레지던트 나우: 8일간의 혁명》 스틸컷, 애플 TV
농인을 위한 대학인데, 왜 총장은 농인이 될 수 없습니까?
“DEAF PRESIDENT NOW.” (이제는 농인을 총장으로!)
1988년 미국 갤러뎃대학교의 학생들이 거리로 나섰다. 갤러뎃은 농인과 난청인을 위해 설립된 세계 유일의 농인 대학이었다. 당시 학교의 역사는 124년에 달했지만, 그동안 농인 총장이 선출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다 드디어 새로운 총장 후보 3인 중 농인 두 명이 올랐다. 학생들은 기대감에 부풀었다. 하지만 이사회가 선택한 사람은 단독 청인 후보였던 Elisabeth Zinser(엘리자베스 진서)였다. 학생들은 곧 학교를 폐쇄하고 한 자리에 모였다.
2025년 공개된 다큐멘터리 《데프 프레지던트 나우》는 그 8일간의 시위를 기록한다.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 《데프 프레지던트 나우: 8일간의 혁명》 스틸컷, 애플 TV
그 혁명을 통해 학생들이 원한 것은 단순히 ‘농인 총장 한 명’이 아니었다. 이들은 총장 교체와 함께 대학 이사회의 최소 51%를 농인으로 구성할 것을 요구했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결국 ‘누가 우리를 대표하고, 누가 우리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가’였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위한 정책과 서비스를 만들 수 있다. 선의를 가지고 장애인의 이야기를 대신 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를 위해 결정하는 것’과 ‘우리가 결정에 참여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8일간의 시위 끝에 학생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졌고, I. King Jordan(I. 킹 조던)이 갤러뎃대학교 최초의 농인 총장이 됐다. 이 사건은 농인 공동체가 보호와 배려의 대상을 넘어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주체임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았다.

시위 시작 신호, 《데프 프레지던트 나우: 8일간의 혁명》 스틸컷, 애플 TV*당시 농인 학생들은 화재경보기를 울리고 불빛을 깜빡이는 것으로 시위 시작을 알렸다
수어, 독자적 언어이자 정체성
《데프 프레지던트 나우》의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뿐만이 아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농인들의 경험을 청인에게 전달하는 방식을 진중하게 고민한다. 제작진이 농인의 시점(Deaf Point of View)이라고 부른 그 방식은 수어를 단순히 음성언어의 대체 수단으로 보지 않는 태도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엿볼 수 있듯 수어는 독자적인 문법과 체계를 갖고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발전해온 하나의 언어다. UN에 따르면 전 세계 7천만 명 이상의 농인이 300개가 넘는 수어를 사용한다. 우리나라 역시 2016년 「한국수화언어법」을 제정해 한국수어를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농인의 고유한 언어’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언어는 단순히 정보를 주고받는 도구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참여하게 하는 기반이다. 그렇기에 수어를 사용할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은 단순히 ‘불편하지 않도록 돕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자신의 언어로 말하고, 정보를 얻고, 사회에 참여하며 정체성을 형성할 권리를 보장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 《데프 프레지던트 나우: 8일간의 혁명》 스틸컷, 애플 TV
들을 수 있게 하는 것에서, 결정에 닿게 하는 것으로
매년 9월 23일은 UN이 지정한 국제 수어의 날이다. 세계농인연맹이 창립된 1951년 9월 23일을 기념해 지정된 날로, 수어의 중요성과 함께 농인의 인권을 되새기는 날이다.
국제 수어의 날을 맞아 《데프 프레지던트 나우》를 바라보면 유독 한 가지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1988년 갤러뎃대학교 학생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의사소통’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자신의 언어로 충분히 말했고 학교도 들을 수 있었다. 다만 그 ‘목소리’가 중요한 결정으로 이어질 기회가 부족했던 것이다.
장애인권 운동에는 “Nothing About Us Without Us”, 즉 ‘우리에 관한 일은 우리 없이 결정하지 말라’는 구호가 있다. 수어를 존중한다는 것 역시 이 말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수어통역을 제공하고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분명 중요한 출발점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정책과 서비스, 문화와 콘텐츠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얼마나 참여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현재 어느 정도의 농인이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지 공식 통계를 찾아보기조차 어렵다는 점은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를 더욱 분명하게 한다.
누군가의 언어를 존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말할 수 있게 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목소리’가 실제 삶의 결정에 닿을 수 있도록 하는 것.
9월 23일 국제 수어의 날, 《데프 프레지던트 나우》가 우리에게 남기는 의미도 바로 거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