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워> 고층 건물에서 계단은 누구의 편일까
영화 <타워>는 초고층 빌딩에서 발생한 화재를 다룬다.
연기가 차오르고, 전기는 끊기고, 엘리베이터는 멈춘다.
이어서 영화는 자연스럽게 말한다.
“계단으로 대피하세요.”
영화 속 계단은 희망의 통로처럼 그려진다.
사람들은 숨을 헐떡이며 계단을 내려가고, 그 길 끝에 탈출이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계단은 모두에게 같은 의미가 아니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 관절이 불편한 노인, 목발을 짚은 사람에게
‘계단으로 대피하라’는 단순한 안내는 사실상
‘대피하지 말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영화는 긴박함을 강조하지만, 그 긴박함 속에서
선택조차 할 수 없는 존재들은 애당초 배제되어있다.
<부산행> - 신속한 사람만 살아남는 세계
영화 <부산행>도 좀비물이라는 판타지성이 있긴 하지만,
극중 ‘대한민국 긴급재난경보령’이 등장하며 재난 상황을 보여준다.
천만 관객을 돌파한 만큼 대한민국 대표 재난 영화로도 볼 수 있다.
좀비로 가득 찬 기차 안에서 살아남는 조건은 명확하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어야 하고 소리를 듣고
즉각 반응할 수 있어야 하며 주변 상황을 순식간에 판단해야 한다.
주인공들은 문을 밀치고, 좀비와 맞서 싸우고,
좁은 통로를 넘어서며 생존을 이어간다.
하지만 이 긴박한 장면들에서도 의문들이 남는다.
만약 이 기차 안에 지체장애인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청각장애인이 경고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발달장애인이 갑작스러운 혼란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부산행>은 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뛰어난 상상력을 동원해 재난에 대항하는 이들의 액션과 희로애락을 흥미진진하게 보여주지만,
그 너머의 인물들을 상상하지는 않는다.
현실의 재난은 영화보다 더 불평등하다
제아무리 블록버스터급 재난 영화더라도
막이 내리면 극장은 안전한 공간이 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경보가 소리로만 울리며,
안내에 쉬운 그림 설명이 없다면 당장 누군가의 생명은 위협받는다.
그래서 많은 나라는 이제 재난을 ‘얼마나 빨리 대피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대피에서 배제될 수 있는가’의 문제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예로 일본과 미국은 재난을 다르게 정의한다.
일본은 동일본대지진 이후, 재난 대응의 기준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재난을 모두에게 동일한 사건으로 보지 않고, 각자에 알맞게 대처해야 하는 상황으로 정의한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재난 대응 매뉴얼에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문자·진동 경보,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 안내, 휠체어 이용자를 고려한 대피 공간이 기본 전제로 포함된다.
미국 FEMA(미국 연방재난관리청) 역시 장애인을 고려하지 않은 재난 대응은 실패한 대응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장애 당사자가 재난 대응 매뉴얼 설계에 참여하여 경험을 공유하고 효과적인 의사결정이 이뤄지도록 목소리를 낸다.
또한 대피 훈련에 직접 참여해 동선, 안내 접근성 등을 파악하고 개선한다. 그곳에서 장애인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재난 대응의 주체다.
지금 대한민국에 재난이 닥친다면?
대한민국에는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국가재난관리시스템(NDMS) 등이 마련되어 있다.
여기에는 장애인 보호가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있음’과 ‘작동함’은 다르다.
실제 매뉴얼을 들여다보면
장애인은 추가적인 대응 대상으로 분리된 경우가 많은 실정이다.
또한 한국장애인개발원(2022) 연구에 따르면, 장애인의 약 60% 이상이
“재난 발생 시 어디로 대피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고 응답했다.
위기상황에서 장애인이 비장애인보다 도움받을 사람이 적다는
유의미한 연구 결과도 있는 것으로 보았을 때(한국장애인개발원, 2025)
재난 상황에서 장애인의 위험도는 더 큰 것으로 보인다.
출처: 한국장애인개발원, 2025 장애인통계연보
그 실태는 코로나19 팬데믹 때 여실히 드러났다.
당시 대한민국의 재난 대응 시스템은
비장애인 기준으로 설계되어 있음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발달장애인은 갑작스러운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 규칙을 이해하지 못해 불편함과 불이익을 겪었다.
시각장애인은 QR코드 출입 인증에서 배제되기 쉬웠고,
청각장애인은 수어통역이 온전히 적용되지 않은 브리핑 탓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 후 발생한 집중호우나 지진 경보 등에서도
장애인의 소외는 지속되었다.
영화가 담지 못한 진실, 우리는 놓지 않아야 한다
재난 영화는 극적인 생존을 그려내며 안전에 경각심을 일깨우고,
재미와 감동을 안겨준다. 그것만으로도 훌륭하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보다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이제 대한민국은 법과 매뉴얼에서 장애인을 ‘별도’가 아닌 ‘기본 전제’로 두어 내용을 바로잡고,
특히 장애 당사자가 재난 대응 전 과정에 직접 참여해
재난 안내와 대피를 전면적으로 점검 및 개선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완전한 사회란 위기 속에서 ‘빠르게’ 살아남는 사회가 아니라,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다.
밀알복지재단은 그 진실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재난 앞에서, 일상 속에서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함께하는 사회가 도래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