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복지재단 헬렌켈러센터 앞, 걷고 있는 시청각장애인과 활동지원사
봄이 다가오는 온화한 날씨 속에 여행이나 나들이를 다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역 곳곳 봄을 알리는 새소리가 울려 퍼지고, 나무 사이에는 꽃봉오리가 맺히고 있지만,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아 봄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시청각장애인(Deaf-Blind)’입니다. 과연 이들도 비장애인처럼 계절을 느끼고, 여행이나 나들이를 다닐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 시청각장애인, 약 1만 명
시청각장애인은 시각장애와 청각장애가 중복으로 있는 장애인입니다. 즉,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기 때문에 주로 ‘촉각’으로 사람·사물을 판단하고, 장애의 발생 시기나 정도, 특성에 따라 의사소통 방법(점자, 근접수어1), 촉수화2) 등)이 다양합니다.
우리나라 시청각장애인은 별도의 장애 유형3)으로 분류되어 있지 않아 정확한 실태조차 파악이 어렵지만, 현재 시청각장애인은 약 1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미국의 경우 1967년 ‘헬렌켈러법’이 제정되면서 시청각장애를 하나의 장애 유형으로 인정하고 관련 지원제도를 확립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지원이나 정책, 공공시설, 제도 등이 전무하여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시청각장애인은 외출하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시청각중복장애인의 욕구 및 실태조사 연구(출처: 한국장애인개발원)」에서 시청각장애인들의 지난 1개월 동안 외출한 빈도를 조사해본 결과, ‘거의 매일’이 34.9%, ‘주 1~3회’는 23.9%, ‘월 1~3회’는 26.8%, 그리고 ‘전혀 외출하지 않음’은 14.5%입니다. 그리고 이중의 절반은 다른 사람의 도움이 있어야 외출이 가능했습니다. 이처럼 시청각장애인은 혼자서는 외출도 불가능할 만큼 일상생활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고 있으며, 조용한 어둠 속을 홀로 걸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1) 근접수어: 잔존 시력이 있는 저시력 시청각장애인을 고려하여 근접한 거리에서 수어를 하는 방법 2) 촉수화: 상대방의 수어에 손을 접촉하여 촉각을 통해 대화를 나누는 방법 3) 장애 유형: 「장애인복지법 시행규칙」 제2조의 ‘장애등급판정기준’에 따르면, 지체장애, 뇌병변장애, 시각장애, 청각장애, 언어장애, 안면장애, 신장장애, 심장장애, 간장애, 호흡기장애, 장루·요루장애, 뇌전증장애, 지적장애, 자페성장애, 정신장애로 분류됨 |
헬렌켈러센터 자조모임 소개
밀알복지재단은 2019년 복지 사각지대의 시청각장애인을 위해 헬렌켈러센터를 설립했습니다. 이 센터는 국내 최초의 시청각장애인지원센터로, 시청각장애인의 권익 향상을 위해 다양한 활동(교육 및 연구사업, 네트워크 구축, 인식개선 사업 등)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에서 고립된 시청각장애인의 사회통합을 위한 ‘자조모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헬렌켈러센터 시청각장애인 자조모임은 주 1회(매주 목요일) 시청각장애인 당사자들이 모여서 서로 교제하고 의사소통하며 다양한 정보를 나누는 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자조모임을 이끌어가는 회장, 부회장, 총무 모두가 시청각장애인 당사자이며, 이들이 월 1회 월례회의를 통해 매월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헬렌켈러센터와의 협의를 통해 매주 점자교육, 문화체험, 특강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답답한 일상 속, 설레는 발걸음
매주 목요일이면 헬렌켈러센터 직원 및 활동지원사, 그리고 시청각장애인 모두가 설레는 마음으로 만납니다. 그리고 답답했던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어딘가에 도착합니다. 헬렌켈러센터는 시청각장애인들이 매주 자주모임을 통해 다양한 장소에서 타인과 함께 하는 활동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삶의 질을 높이고, 사회통합 의욕도 고취시키고 있습니다.
지난 2월 23일(목)에는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도자기 물레체험’을 위해 경기도 이천시에 있는 도자기 체험장(‘라당도예’)을 방문했습니다. 도자기 물레체험은 물레를 이용해 손으로 직접 흙을 빚으며 그릇을 만드는 체험으로, 만들어진 그릇에 예쁜 색으로 그림을 그려 나만의 도자기 그릇을 완성하는 활동입니다. 본격적으로 체험하기에 앞서, 시청각장애인들이 체험에 대해 숙지하고 원활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헬렌켈러센터 직원 및 활동지원사들이 충분히 안내했습니다.
손끝으로 만든 아름다운 도자기
체험이 시작되자, 시청각장애인들은 물레 위에 도자기 흙을 넣고 열심히 손으로 빚었습니다. 그리고 도자기를 만드는 동안 시청각장애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를 중복으로 갖고 있는 시청각장애인에겐 촉각이 매우 중요한데요. 잘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손끝으로 도자기 흙을 조심스럽게 만지며 자신만의 개성 있는 도자기 그릇을 완성했습니다.
도자기 그릇을 일정 시간 동안 햇빛에 말린 후, 그릇에 그림을 그려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시청각장애인들은 활동지원사의 안내에 따라 알록달록한 물감으로 천천히 그림도 그리고, 글씨도 적어보았습니다.
도자기 그릇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시청각장애인과 활동지원사
평범해 보이던 도자기 그릇에 여러 가지 무늬를 새겨 놓고 나니, 어느새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만의 그릇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시청각장애인과 활동지원사, 헬렌켈러센터 직원 모두가 함께 협력하며 보람찬 시간이 되었습니다.
“헬렌켈러센터 자조모임 참석을 권유 받았을 때는 거리도 멀고 낯설어서 고민 되었는데, 자조모임에 참석하고 나서 너무 좋았습니다. 시청각장애인들과 교제하며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는 것이 너무 좋았고 이제는 한 번도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습니다. 저와 같이 집에만 있는 시청각장애인들이 더 많이 자조모임에 나오셔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 헬렌켈러센터 자조모임 참석자, 조계석 시청각장애인
“자조모임은 시청각장애인들이 자율적으로 모여서 서로의 장애를 보듬고 위로하며, 자신의 자립 경험을 나눌 수 있는 곳입니다. 또 모두에게 귀한 모임의 장이며 시청각장애인의 사랑방과 같은 곳입니다. 특히 헬렌켈러센터의 지원과 협력을 통해서 다양하고 즐거운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2월에 이천 도자기체험 시간을 가졌는데 물레의 진흙을 자신이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어가며 즐거워하는 시청각장애인들을 보니 너무 행복했습니다. 앞으로도 헬렌켈러센터와 협력하여 시청각장애인에게 유익하고 도움 되는 자조모임을 운영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 헬렌켈러센터 자조모임 회장, 김지현 시청각장애인
함께하면 즐거운 자조모임
헬렌켈러센터의 시청각장애인 자조모임은 향후 새로운 시청각장애인들을 발굴해 교제와 정보 습득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더욱 강화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시청각장애인들이 기쁘게 찾아와서 마음껏 원하는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조모임에 참석한 시청각장애인들이 사회적 역량을 강화하여 완전하게 당사자들이 직접 운영하는 모임으로 성장시키려고 합니다.
앞으로도 헬렌켈러센터와 시청각장애인들이 함께하는 자조모임에 많은 관심 부탁드리며, 지금도 어딘가에서 소외되어 있는 시청각장애인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함께 힘이 되어주시길 바랍니다.